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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 카를린 엠케

free-and-easy 2018. 2. 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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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독일인이며 여성이자 성소수자이다. 이 사실을 상기하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사회가 혐오로 물들어가고 있다. 여성 혐오, 남성 혐오, 맘충, 들딱충, 급식충 등등. 뭐 그리 혐오하며 벌레로 만들어버리는지. 왜 그렇게들 서로를 증오하지 못해서 안달일까?

앞장서서 증오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에 나서서 소리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고 위협을 가한다. 증오를 조장하고 있다. 그 옆에 무수한 사람들이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증오를 허락한 것이다. 앞장서서 선동하는 사람도 잘못되었지만 증오를 동조하는 사람 또한 잘못되었다. 클라우스니츠 난민 수용소 예시가 증오에 대해 잘 나타낸다.

난민 수용에 대해 말이 많다. 자신들의 터전,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그런데 왜 사람들은 약자에게 자신의 가진 것 중 1을 내어주지 못해서 안달일까. 증오는 강자에게 뻗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 어린이, 노인, 성소수자 등등에게 뻗어나간다. 한두 명이 그렇다면 잘못인 걸 인식하고 바로잡을 수도 있겠으나 다수, 혹은 나라가 그러하다면 그것은 그저 옳은 일이 되어 버리고 그렇게 해야 해도 된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마음속으로 나는 모든 사람이, 비록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는 일이라도 부당한 일이 있으면 그 사실을 의식하기 바란다. 모욕과 멸시를 당하는 희생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런 모욕은 당연히 상처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기를 바란다.

 

자신의 상처에 대해 분명히 말하려 하는 사람, 늘 한결같은 배제의 방식에서 느끼는 비애를 더 이상 억누르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흔히 '분노한' 사람으로('분노한 흑인 남성','분노한 흑인 여성',이라는 묘사는 무력함에서 오는 절망감을 근거 없는 분노인 것처럼 재구성하려는 표현),'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으로(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 여성에게 가장 흔히 가져다 붙이는 표현), 자신의 고통스러운 역사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으로(유대인에 대해) 취급된다. 이 모든 폄훼하는 표현들은 무엇보다 혐오와 구조적 멸시의 희생자들이 스스로 방어할 가능성마저 빼앗는 역할을 한다. 저런 수식어들을 덮어씌우면 희생자들은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워진다.

 

 

이방인이라고 낙인찍는 '쉬볼레트'를 멈춰야 한다. 백인이 흑인을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남성이 여성을 편을 가르고 낮추고 이방인이라고 낙인찍는 행위는 집어쳐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자비를 베푼다는 말도 웃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신이고 우리는 신의 계시를 받는 존재인가. 그저 다름, 복수의 존재일 뿐인데.


IS는 딱 봐도 미친 집단인데 왜 그리 무보수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일까 생각해봤다. IS 가 만든 이미지 덕분에 무슬림이라고 하면 일단 테러부터 떠올린다.  무슬림 사람들은 고립되고 배제된다. 여기저기서 버림받는다. 그러면 IS는 이들을 거둬준다. 무슬림 사람들에게 IS는 신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순수 숭배가 가능해진다. 무슬림의 유럽과 비무슬림의 유럽으로 양분하는 것이 지하드의 명시적인 단계적 목표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어떤 한 남자가 잘못 했다고 남자 전체를 싸잡아서 욕하지 않는 것처럼 약자인 사람, 여자, 노인, 아동, 성소수자 들이 잘못을 하더라도 싸잡아서 배제시키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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