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 - 마리나 칸타쿠지노
반은 피해자의 용서, 나머지 반은 가해자의 용서다.
피해자가 용서하는 마음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다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가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나아가기 위해서 용서를 한다고? 죽은 남편/아내/자식은 용서도 못하는 입장인데 가족이란 이유로 용서를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아들은 죽었지만 가해자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임을 생각하니 증오심이 가라앉았다니.... 가해자의 부모도 또 다른 피해자이며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니....
전혀 이해를 하고 싶지 않은데.
가해자가 용서하는 내용은 솔직히 말해서 어이가 없고 기분이 상해서 끝까지 읽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적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게 면죄부라도 되는 양 전부 밝히는 것도 꼴보기 싫었다. 철없을 적, 젊었을 적, 아니면 객기에 취해 타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그때의 자신을 자신이 용서한다는 게 말이 되나? 본인 자신만 용서했지 자신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 혹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결국은 자신은 살아 숨 쉬고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행복한지 아닌지는 궁금하지도 않지만 '살아가고'있지 않은가.
여러 사람들이 경험담은 읽는 내내 도대체 그놈의 '용서'를 꼭 해야 하나. 용서를 안 하면 '성인'이 아닌가? 내가 그러한 상황이라면 절대 용서 못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더 나아가지 못할 인간인가?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경험담만 죽 늘어놓고 책이 끝이 났다면 이 책은 내게 굉장히 별로인 책이 될 뻔했다. '용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저자가 느꼈던 부분들을 읽으며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용서가 매우 강력한 치유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과 용서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점이었다.
하루는 전부 용서했다가도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또다시 증오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아닐까.
용서를 하게 되면 같은 범죄로 희생당한 유가족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다.
용서는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와 맞먹는 정도의 반감을 주기도 한다는 것!
용서가 화해의 의미를 지니지만 반드시 가해자와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화해라고.
용서를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다루는 일이 많아졌다. 용서 부추기기 혹은 용서 인플레이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쉽게 용서하면 고통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굉장히 불편했던 범죄자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폭력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도의 진정한 목적은 그에 따르는 고통과 상처, 그리고 폭력이 남긴 유산을 드러내자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확실히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보다는 용서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예수님도 십자가에 목 박히셨다며 자신도 용서한다며 종교와 결부시켰을 때 굉장히 거부감이 든다.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해야 너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너를 위해 용서하라는 말이 도움이 될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공감 받고 나누고 싶어 읽는 독자가 이 책의 매우 극적인 상황들을 읽고 자신이 겪은 일은 용서고 나발이고 할 정도도 아니라고 느낄까 봐 괜한 걱정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의 크기는 다르고 용서의 크기도 다르다.